전체메뉴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카테고리
  • 검색
  • 유형별
  • 컬렉션 소개
자료유형
KDC 분류
KDCP 분류
발행년도 ~

다국어입력기

조선왕실자료 소개

 

 

 

 

전통시기에 왕()은 하늘과 사람을 이어주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왕은 하늘의 명령을 받아 땅에 기준(基準)을 제공하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일을 주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왕실(王室)은 왕과 그의 가족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왕과 왕의 혈손,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들이다. 왕에서 왕으로 이어지는 왕통(王統)은 피를 통해서만 이어지는 것으로, 왕이 신성한 존재였기 때문에 왕통 또한 당연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왕의 피를 이은 혈손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은 단순하게 권력자의 가족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들을 따로 왕실(王室)이라고 부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은 권력자였으며 조선의 왕과 왕실 또한 그러했다. 대개의 왕들은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며 권력을 통한 부와 사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조선의 왕실의 구성원 또한 궁궐에서 화려한 생활을 했지만,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제한되었으며 심지어 소박함을 추구하기조차 했다. 이러한 절제된 부의 향유에서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이 서책(書冊)이다.

 

조선은 원래 문헌의 나라였다. 권력자와 지식인을 지나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책을 좋아했다. 다양한 책을 보유하고 읽었으며 중국에서 없어진 책이 오히려 조선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책은 질 좋은 종이를 사용하여 단단하게 제책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전란 등으로 서책이 소실되면 국가의 역량을 동원하여 다시 복원하는 것으로 전란극복의 계기를 삼았다.

이러한 조선의 서책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조선 왕실의 서책이다. 역대 군왕들은 서책에 관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최상의 종이를 사용해 숙련된 장인에게 책을 제작하도록 했다. 경전과 중요서적의 경우 목판 혹은 활자를 이용해 오자와 탈자 없이 대량으로 제작해 각 도()와 신하에게 내려 주었다. 왕은 최상의 서책을 나누어 주는 것을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왕실의 책에 대한 관심은 창작과 기록으로 이어져 왕조가 시작해서 끝 날 때까지 근 500년 동안 다양하고도 풍부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 다양한 의궤(儀軌) 등을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기록은 정확하고 세밀할 뿐만 아니라 조선왕실 전체를 관통하여 철저하게 보관해 왔다는 점에서 조선왕실 서책문화의 정점을 보여준다. 조선은 사고(史庫)를 만들어 실록을 포함한 중요 서책을 보관했다. 사고에는 관리를 배치해 관리하게 했는데 험준한 오지에 사고를 만들어 전란에 대비했으며 병졸을 배치해 기타의 사고를 방지했다. 매년 일정한 시기에 책을 꺼내 말리는 작업인 포쇄(曝曬)를 진행했으며 도서의 열람과 출납과 등을 법을 제정하여 절차에 맞게 진행했다. 이 모든 관리상황은 포쇄일기, 실록형지안 등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왕실의 서책은 책의 물리적인 질과 내용 면에서 최상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엄중한 보관방식을 통해 서책을 대하는 조선왕실과 국가의 태도를 확인 할 수도 있다. 조선왕실의 서책문화는 조선 최고의 문화 중 하나인 것이다.

 

 

 

 

 

[카테고리별 소개]

 

 

왕실의 역사서술 [ 바로가기]

 

조선왕조는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망라하여 남겼다. 조선은 평소 조정에서 생산된 문서와 사관이 쓴 사초(史草) 모두 모아두었다. 그리고 임금의 사후에 실록청을 설치해 그간 모아둔 기록을 날짜별로 정리해 책으로 묶었다. 이렇게 엮인 책은 왕의 묘호를 붙여 󰡔○○실록󰡕이라 하며, 모든 왕의 실록을 통칭하여 󰡔조선왕조실록󰡕이라 부른다. 그 분량이 방대하여 총 1894888책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단순히 실록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의 명단·역할·기간 등을 정리한 기록,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의 관리기록, 사고에 보관된 책들을 주기적으로 햇빛에 말리던 포쇄에 관한 기록까지 남아있는 점이다. 또 실록은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우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열람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국왕이라도 함부로 볼 수 없었다. 조선은 가히 기록의 나라였다.

 

 

왕실의 연원 [ 바로가기]

 

조선의 왕은 종묘와 사직의 주인이자 국정을 주관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국왕의 권력은 하늘에게 받은 것으로 신성한 것이었으며 자자손손 세습되는 속성을 가졌다. 따라서 천명(天命)이 끊이지 않도록 왕위를 순조롭게 계승하는 일은 왕의 사명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계보를 왕통(王統) 혹은 대통(大統)이라 불렀다. 왕실의 족보는 왕을 중심으로 한 왕통의 기록, 왕의 배우자에 대한 기록, 왕이 되지 못한 선대왕의 자식들의 기록 등으로 다양하게 편찬된다.

 

 

왕실의 정치 [ 바로가기]

 

전통시대 왕과 국가는 분리되지 않았다. 국왕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그만큼 타락하기 쉬웠다. 조선의 국왕 역시 절대자였지만 그의 통치는 임의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반드시 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행해 졌다. 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행위는 이전의 기록을 참고했다. 왕이 국가와 동일시되었던 까닭에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이 혼용되기 쉬웠지만 조선은 둘을 구분지었으며 왕실의 재정조차도 절차와 목적을 규정해 집행했다. 또한 왕실의 여러 사업을 기록으로 남겨 왕의 개인 사업이 아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국가의 사업이 되도록 했다.

 

 

왕실의 전례 [ 바로가기]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왕의 행위를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기록의 목적이 후대 왕의 정치에 참고자료로 사용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자세하게 기록했다. 특정 행사를 치루기 위해 행사 중앙본부인 도감(都監)을 설치했는데, 도감에서 행사에 관한 일체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세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등록(謄錄)이다. 행사가 끝난 뒤에 다시 의궤청을 설치해 행사의 모든 것-각종문서, 인원, 소요물품, 반차도, 행사 후 유공자의 포상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이것이 의궤(儀軌)이다. 의궤는 왕이 보는 어람용, 해당 부서용, 사고(史庫) 보관용 등이 만들어 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궤는 왕이 참여하거나 주관하는 각종 국가 전례와 행사 등에 참고자료로 사용되었다. 조선의 기록정신은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어 냈을 뿐만 니라 등록과 의궤 등의 풍부한 실무 사례집을 만드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목적은 가능한 많은 것을 후세에 남겨 조금 더 좋은 정치를 이룩하기 위함이었다.

 

 

왕실의 학문 [ 바로가기]

 

조선의 왕은 천명을 받은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인간인 성인(聖人)이 되도록 교육받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제왕의 학문을 성인의 학문 곧 성학(聖學)’이라고 한다. 조선에서 제왕의 학문은 마키아벨리 식의 탁월한 정치 기술이 아니라 성인과 같이 누구나 존경할 수 있는 인격을 닦는 일이란 뜻이다. 따라서 󰡔훈민정음󰡕과 같은 탁월한 업적이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도덕감정에서 비롯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성학을 위해 왕실은 항상 최고의 서책을 구비했다. 다시 말해 왕실에서 보거나 발행한 책은 조선에서 유통되는 서적의 표준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왕실의 문예 [ 바로가기]

 

조선에서 학자들은 임금이 시를 짓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태양이 지상의 만물을 그 아름답고 추함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비추는 것처럼 군왕 또한 그러해야 했기에 감정을 드러내는 예술활동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 또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 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내려 충성을 이끌어 내거나 국왕의 권위를 세우기도 했다. 혹은 신하와 시를 주고받는 방법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 에대한 자료는입니다.

상세검색

자료유형
KDC 분류
발행년도 ~

다국어입력기